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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지음 이야기

치료자와 환자는 <여행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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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조회 작성일 17-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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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nri Rousseau>

 

 

  프랑스 소설가인 앙드레 말로는 수년 동안 고해성사를 해왔던 시골의 한 신부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깨달은 바를 이렇게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행하며 사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없다." 치료자나 환자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뿐 아니라 어두움, 이를 테면 환멸, 노화, 질병, 고립, 상실, 무의미, 고통스러운 선택, 그리고 죽음 등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냉혹하게 표현했다.

 

  어려서 장래를 생각할 때, 우리는 마치 극장에서 커튼이 올라가기 전 기대에 차서 연극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 같다. 우리가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가 미래를 미리 예견할 수 있다면, 아이들이 마치 죽음의 형이 아니라 삶의 형을 선고받고도 그 선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는 죄수처럼 보일 수 있다.

 

 또,

 

  우리는 먹이로 삼을 양을 한 마리씩 뽑고 있는 도살자 앞에서 장난치며 뛰노는 초원의 양들과 같다. 그것은 마치 행복한 시절에 우리가 질병, 빈곤, 신체장애, 혹은 정신장애 등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운명의 불운함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쇼펜하우어의 견해가 그의 개인적인 불행으로부터 영향을 받긴 했지만, 모든 자의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절망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나와 아내는 우리가 아는 모노폴리 게임중독자들, 말 많은 나르시스트들, 예술적인 수동-공격형의 사람들을 위한 가상의 저녁식사 파티나, 또는 반대로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만을 초대하는 "행복(happy)" 파티를 생각해보면서 웃곤 한다.  그런데 온갖 종류의 별난 파티를 위해 사람들을 채우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한번도 "행복한 사람들을 위한 파티"를 채울 수 있을 만큼의 사람들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매번 성격이 쾌활한 몇몇 사람들을 생각해 놓고 또 다른 사람들을 찾는 동안 그들의 이름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기다리지만, 우리의 행복한 손님들이 결국 그들 자신이나 아내, 자식의 심각한 질병 등 삶의 역경에 부딪히게 되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그러나 현실적인 삶에 대한 견해는 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쳐왔다. 환자/치료자, 내담자/상담자, 피분석가/분석가, 내담자/촉진자, 혹은 가장 불쾌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용자/서비스제공자 등 치료적인 관계를 일컫는 말들이 많이 있지만 그 어떤 말도 내가 치료적인 관계에 대해 느끼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 대신에 나는 나와 나의 내담자를 여행의 동반자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 말은 "그들"(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우리"(치료하는 사람들)간의 차이를 없앤다. 훈련을 받는 동안, 나는 종종 충분히 분석 받은 치료자의 견해를 접하곤 했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많은 동료 치료자들과 절친한 관계를 맺고, 이 분야의 선배들을 만나고, 나의 이전 치료자들과 스승들로부터 도움의 요청을 받기도 하면서 이러한 견해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면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가 동반자이며 치료자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존재의 비극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치료에 관한 이야기 중 하나는 헤르만 헤세의 <유희의 명인>에 등장하는 조셉과 디온이라는 성서시대 유명한 치료자들의 이야기이다. 두 명의 치료자 모두가 매우 효과가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작업했다. 더 젊은 치료자인 조셉은 침묵을 통해 작업했고 듣는 것을 중요시했다. 조셉은 순례자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들의 고뇌와 불안은 조셉의 귀로 들어가서 물처럼 사라져 사막에 떨어졌고, 고해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평온을 얻었다. 그와 반대로, 더 나이가 많은 치료자인 디온은 그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직면하고 그들이 고백하지 않은 죄를 찾아냈다. 그는 위대한 판단자요, 질책자요, 수정자였으며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치료했다. 그는 고해자들을 아이처럼 대하고 조언을 주고, 참회를 하도록 벌하며, 순례나 결혼을 명령하고 원수들과 화해하도록 시켰다.

  이 두 명의 치료자들은 조셉이 영적으로 병이 들어 어두운 절망에 빠져 자기 파괴적인 생각들로 괴로워하기 전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수년 동안 서로 라이벌로 활동했다. 자신의 치료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치료할 수 없었던  조셉은 디온의 도움을 구하고자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순례여행에서 하루는 저녁 무렵 오아시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나이 많은 한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조셉이 자신의 순례여행 목적과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설명했을 때 그 여행자는 자신이 디온을 찾는 것을 돕겠다고 제안했다. 나중에, 함꼐 하는 긴 여정의 중간쯤, 나이 많은 여행자는 조셉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는데 놀랍게도 그는 조셉이 찾고있었던 디온이었다.

  디온은 망설임 없이 좌절한 자신의 라이벌을 집으로 초대하고 그곳에서 함께 살며 일했다. 디온은 먼저 조셉을 하인으로 일하게 하고, 나중에는 학생으로 높여주고, 마침내는 완전한 동료로 대했다. 세월이 지나 디온은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두고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그의 젋은 동료들을 불렀다. 조셉은 예전에 심하게 병들어 도움을 구하고자 디온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그때, 그의 여행 동반자이며 안내자가 바로 디온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이 느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죽어가고,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디온은 그 기적에 대한 자신의 침묵을 깨뜨렸다. 디온은 자신 역시 절망에 빠져있었던 그때 자신에게도 그 일은 기적 같았다는 것을 고백했다. 그 역시 공허하고 영혼의 병으로 자기 자신을 도울 수가 없어서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오아시스에서 서로 만났던 그날 밤, 그 역시 유명한 치료자인 조셉을 찾기 위한 순례여행 중이었던 것이다.

  조셉의 이야기는 항상 기이한 방식으로 나를 감동시킨다. 이 이야기는 도움을 주고받음, 진실과 표리부동, 치료자와 환자와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두 사람은 굉장한 도움을 받았지만 그 방식은 서로 매우 달랐다. 젊은 치료자는 가르침과 멘토를 받았고 또한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는 양육과 보살핌을 받았다. 그에 반해 늙은 치료자는 상대방을 돕고, 자식으로서의 사랑과 존경, 고독함에 대해 위안을 주었던 사람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서 나는 이 두 명의 상처받은 치료자들이 서로에게 좀더 도움이 될 수 없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그들은 좀더 깊이 있고 진실 되며 좀더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는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정한 치료는 그들이 여행 동반자이며, 그들 모두가 단순한 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고백하는 정직함을 보였던 디온의 죽음의 순간에 일어났는지 모른다. 20년간의 비밀이 그 자체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좀더 심오한 종류의 도움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디온이 죽음을 앞두고 했던 고백이 20년 전에 일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치료자와 도움을 구하는 이가 서로 해답 없는 질문에 맞서는데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

 

  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고 질문 그 자체를 사랑하도록 노력하라"는 한 젊은 시인에게 보냈던 릴케의 편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나는 여기에 "질문을 하는 사람 또한 사랑하도록 하라"라고 덧붙이고 싶다.

 

 

 

-------------------------------------------------Irvin D. Yalom <치료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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