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ty 커뮤니티

마음지음 이야기

사랑 없이는 정말 살 수 없는 걸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조회 작성일 16-04-26 00:00

본문

예전에 서른을 훌쩍 넘긴 후배가 풀이 죽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아무래도 결혼할 팔자가 아닌가 봐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그만 모범 답안을 말하고 말았다.

“이 사람아, 그래도 사랑을 하고 살아야지. 사랑, 그게 얼마나 좋은건데...”

하지만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그때 마치 사랑 지상주의자라도 된 양 사랑하는 사람과 짝을 이루는 행복을 이야기했지만, 꼭 사랑이 남들과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의 1955년 작 「사랑의 종말」은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 ‘애수’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차원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런던, 소설가 모리스는 고위 관료 헨리의 파티장에서 헨리의 아내 사라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성실하고 아내에게 헌신적이지만 정렬이 없는 남자 헨리 옆에서 자신의 열정을 감추고 살아온 사라, 그녀 또한 모리스의 예술가적 기질에 푹 빠진다.

어느 날 둘은 독일군의 공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사랑을 나누던 중 공습으로 벽이 무너져 내려 모리스가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순간 사라는 이 남자가 죽었다고 판단하고, 신을 향해 기도한다.

“하느님, 이 사람을 살려만 주시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저는 영원히 그를 단념하겠습니다.”

얼마 뒤 그는 다시 깨어났고, 그녀는 정말 다음 날 한마디 설명도 없이 그를 떠나간다. ‘만나지 않아도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의 입장에서 보면 사라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하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를 떠나간 것이다. 사라는 그 전까지 신을 한번도 믿어 본 적이 없지만 나중에 그녀는 인간적인 사랑을 승화시켜 자기 내부의 신성을 발견하고 신을 향한 기도에만 매달리게 된다.

“평생 이런저런 남자를 만나 조금씩 사랑을 나누며 근근이 일생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고, 그기에 당신이 계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남은 것이라곤 오직 당신뿐이었습니다”라면서.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이성을 사랑하든지 신을 사랑하든지 그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선 같은 맥락에 있음을 보여 준다. 단지 어떤 모습으로 승화되느냐에 따른 차이, 혹은 그 대상에 따른 차이만 이 있을 뿐이다.

사랑은 인간의 조건이자 운명이다. 특히 성직자들의 신에 대한 사랑은 사랑을 승화시킨 전형을 보여 주는데, 마더 테레사 수녀의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열아홉 살에 수녀원에 들어가 스물다섯 살 때 신앙적으로 하느님과 영원히 결혼한 몸이 되었다. 그리고 서른여섯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단신으로 인도 캘커타의 빈민촌에 들어가 평생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렇게 살다 간 테레사 수녀를 보고 그녀가 ‘사랑 없이 살았다’라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우리가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 각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상처를 치유받기 위한 바람이라면, 예술가들은 창조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상처를 복원하려고 한다. 그러한 상처의 복원을 위해서 새로운 현실을 창도하고, 이것이 바로 예술 작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가 시걸이 말하길, 예술가들은 새로운 작업에 돌입할 때마다 어릴 적 우울하던 위치로 돌아간다고 했다. 또, 예술가의 목적은 비록 그가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며, 예술의 전수란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는 능력에 있다고도 했다. 이 말들을 곱씹어 보면 예술가들의 작업 활동과 그 결과물의 의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사랑의 의미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술 활동이 이와 같다면 그 예술가가 지닌 것과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관람객은 그가 만들어 놓은 예술품을 보면서 자기의 상처도 함께 치유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치유의 예술, 이것은 얼마나 멋진 작업인가.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록은 어렸을 때 혼자 버스를 타고 런던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버스 종점에서 차비가 떨어져 집까지 걸어가는 바람에 밤 9시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그의 아버지는 말없이 문을 열어준 후 그에게 파출소로 가서 경곤에게 쪽지를 전하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런데 그가 전해 준 쪽지를 읽고 난 경관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5분동안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못된 아이는 이렇게 벌받지”라고 말하면서....

여섯 살 때 이런 충격적인 일을 겪은 히치콕은 자신이 만든 영화 곳곳에 감옥에 갇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법적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냈다. 히치콕 또한 자신의 상처를 영화에 투영시킴으로써 이를 치유받으려 한게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영화 또한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그것을 창조하는 감독은 다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그것을 통해 자기 내부에 있는 상처를 복원하려 하기 때문이다.

팀 버턴 감독 또한 자신의 상처를 스크린에 옮겨 놓음으로써 그것을 치유하고 복원시키려 했다. 특히 그의 영화 ‘가위손’의 에드워드는 팀 버턴의 모습과 유사한 면이 많다. 그는 어린 시절 늘 외롭고 우울함에 차 있었다. 그런데 가위손 에드워드도 성안에 갇혀서 외롭고 우울한 날들을 보낸다. 에드워드는 그 속에서 느끼는 절망과 좌절, 분노를 얼음과 나무를 조각하면서 분출하는데, 이때 그 분노는 아름다운 조각작품으로 승화된다. 그것은 팀 버턴 자신이 공을 들여 영화를 만들어 내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사람은 사랑이 있어야만 제대로 태어나고 자랄 수 있는 운명을 지녔다. 그리고 사랑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지어 주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가족이든,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든, 아니면 예술이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든... 결국 어떤 형태로든 모두 사랑을 하며 사는 것이다.

 

< 출처 :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김혜남 지음, 갤리온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